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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수많은 곳을 들락거릴 때마다, 내가 알거나 혹은 모르는 것들이 하나같이 그 어떤 장소가 되어서는 내 앞에 펼쳐졌다. 과거도 그리고 상처의 기억도 장소이며, 계절도 그렇고, 시간도 그렇다. 처음에는 아무래도 내 기억 속을 헤맨 듯하나, 여행이 끝날 즈음 해서는 떠나온 이유도 아득한 채로 다만 눈앞의 풍광 속을 타박타박 걷고 있었다. 그 사이 열병에 걸려 몇 번 쓰러지고 깨어날 때마다 나는 몇 개의 말들을 마음에 새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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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직 길 위에 있는 사람들아, 너무 외롭거나 아프지 마라. 세상에는 지키지 못할 약속이 있고, 못 만날 사람이 있지만, 세상 끝에 걸쳐 눈이 눈물처럼 빛나는 그대의 여행은 언젠가 끝이 날 것이다. 사라지지 말고 이 말을 가슴에 새겨다오. 오래오래 당신은 여행생활자다.
여행생활자 서문 중에서 -
여행이란 마치, 다음 생에서가 아니라 이 생에서, 다른 생활을 살아보는 일.
모래 폭풍 속의 황량한 자갈밭을 슬픔 없이 걷는다.
고요와 평화 속에서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는 여행자는 사실 그리 많지 않을 거다. 평화와 완정은 여행자의 꿈이지만, 어찌 보면 처음부터 여행과는 함께 설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안정을 뿌리치고 떠도는 것이 여행의 근간이고 여행자에게 천국의 이미지는 어쩌면 꿈만으로 충분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긴 여행 중에 가끔씩은 한 곳에 오래 머물면서 생활의 결핍을 채워보려는 것이 또한 여행자의 욕심이다. 좁은 방에서 요리를 할 수 있는 전기포트를 사거나 현지인들이 다니는 시장을 어슬렁거리면서 저도 무슨 목적이라도 있는 양, 여기저기 가게를 둘러보고 계란이나 야채 몇 다발을 사서 숙소로 들어오는 거다.
여행은 모순이다. 자유 속에서 생활을 꿈꾸는 아둔한 우여곡절이다. 여행의 길은 그저 멀어서 먼 길이 아니고 길을 알면서도 스스로 나아가서 길을 잃고, 멀리 돌아가야 하는 먼 길이다. 그 길은 절대의 빛으로 이루어진 눈부신 천국으로 가는 길이 아니고 동서 남북이 없는 눈부신 환한 빛 속에서 어둠을 조적해서 쌓아가는 제 속의 길이다.
여행은 드러냄이 아니고 숨김이다. 함부로 생활의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고 커다란 비밀을 제 속에 품을 때까지 제 몸을 숨기면서 가야 하는 길인지도 모른다.
아무런 말도 안하고 시계를 자주 들여다보며 시간과 풍경들을 제 속에 저만이 읽을 수 있는 점자로 조각하던, 드러냄이 익숙하지 않은, 벙어리 청년을 생각해본다.
기차는 또 다시 귀청이 떠나갈 듯 경적을 울리고 있다.
나는 목적도 없이 저 기차에 올라 탈것이다.
꼬박 기다려 아침을 맞아본 사람은 안다. 기다림이란 것이 결코 대상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깜깜한 밤을 지나 푸른 여명이 밝아올 때까지 그는 제 속에서 울려오는 소리들을 들으며 어둠 속에 앉아 있다. 아침이 밝아왔을 때 환한 햇살 속에서 그는 지난밤의 소멸을 홀로 바라본다.아침 햇살에는 아무래도 지난밤이 너무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본문 중에서, 유성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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