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수많은 곳을 들락거릴 때마다, 내가 알거나 혹은 모르는 것들이 하나같이 그 어떤 장소가 되어서는 내 앞에 펼쳐졌다. 과거도 그리고 상처의 기억도 장소이며, 계절도 그렇고, 시간도 그렇다. 처음에는 아무래도 내 기억 속을 헤맨 듯하나, 여행이 끝날 즈음 해서는 떠나온 이유도 아득한 채로 다만 눈앞의 풍광 속을 타박타박 걷고 있었다. 그 사이 열병에 걸려 몇 번 쓰러지고 깨어날 때마다 나는 몇 개의 말들을 마음에 새기었다. . . . 여직 길 위에 있는 사람들아, 너무 외롭거나 아프지 마라. 세상에는 지키지 못할 약속이 있고, 못 만날 사람이 있지만, 세상 끝에 걸쳐 눈이 눈물처럼 빛나는 그대의 여행은 언젠가 끝이 날 것이다. 사라지지 말고 이 말을 가슴에 새겨다오. 오래오래 당신은 여행생활자다...
Va' dove ti porta il cuore 오랫동안 살아왔고 많은 사람들을 떠나보내서 그런 건지, 난 지금 죽은 사람들은, 그들이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과 우리가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없기 때문에 그만큼 무게를 지니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 내게 바람은 너였고, 청년기를 맞은 네가 소유한, 싸우기 좋아하는 생명력이었어. 얘야, 넌 그런 걸 이해하려고 애써본 적이 없겠지? 우린 같은 나무에 살고 있었지만 너무도 다른 계절 속에 살았던 거야. 시간을 낭비하는 건 조금도 중요한 문제가 아니란다. 인생은 경주가 아니라 표적 맞추기이며, 계산된 시간을 얼마나 절약하느냐보다는 오히려 중심을 찾는 능력이 중요하단다. 나는 정말 고독했다. 나는 누구와도 진정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물..
권박사의 말에 따르면 그 인간이라는 종의 무대가 이십만 년만에 드디어 막을 내릴 때가 온 것이다. 마치 공룡들이 결단력 있게 자신들의 시대를 끝낸 것처럼 인간도 종의 역사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왜 그러냐고 ? 글쎄, 인간이라는 종이 자신들이 만들어낸 문화의 내적 질서를 더이상 견딜 수 없단다. 하지만 이거 웃기지 않은가. 지구의 외적 환경이나 내적 환경도 아니고 인간이 스스로 만든 질서를 견딜 수 없다니. 나는 혜성의 충돌, 기상이변, 한 미치광이에 의해 잘못 눌러진 원자 폭탄의 발사, 공기전염되는 치명적 바이러스의 출현, 인공지능과 기계문명의 가공할 발전 등등의 이유로 인해 인류가 멸망할 수도 있을거라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그러나 인간 자신이 만들어 낸 질서 때문에 스스로 종의 역사에서 물러날 것..
제5도살장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커트 보네거트 (아이필드, 2005년) 상세보기 오랫동안,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종종 내게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고, 나는 대게 주로 드레스덴에 관한 책을 쓰며 지내노라고 대답했다. 한번은 영화 제작자인 해리슨 스타에게도 그렇게 말했더니,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반전(反戰) 책이오? " "예, 그럴 겁니다." 내가 대답했다. "반전 책을 쓴다는 사람들을 만나면 내가 뭐라는지 아시오?" "아니요, 뭐라고 하시는데요?" "'차라리 반빙하(反氷河) 책을 쓰지 그래요?' 그럽니다." 물론, 그의 말은 전쟁은 항상 있는거고, 빙하만큼이나 막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동감이다. 그리고 전쟁이 빙하처럼 그렇게 계속해서 밀려오지 않더라도, 그 흔해빠진 죽음은 여전히..
토막살인사건 어느날 귀가해보니 방에 시체가 있었어요 나는 시체와 밥을 먹고 주말 연속극을 보고 같은 이불에서 잤어요 난 시체에게 잘 해줬어요 혼자 있으면 외로울까봐 너무 늦지 않으려 노력했고 갈아입힐 옷도 샀지요 그때는 행복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시체는 썩기 시작했어요 얼굴에 진물이 흐르고 입에서 검붉은 피가 나오기 시작했지요 집주인에게 들키면 쫓겨날 판이었어요 그래서 큰 가방을 사서 시체를 넣었어요 시체가 너무 컸기 때문에 토막을 냈지요 그게 전부에요 누군가 내 방에 두고간 시체를 가방에 넣어 쓰레기장에 버린거에요 이게 죄라면 이 세상에 누가 결백한가요 집에 시체 하나쯤 없는 자가 어딨어요 - 전윤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