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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비닛 - 김언수

나실이 2010. 3. 24. 21:26

권박사의 말에 따르면 그 인간이라는 종의 무대가 이십만 년만에 드디어 막을 내릴 때가 온 것이다. 마치 공룡들이 결단력 있게 자신들의 시대를 끝낸 것처럼 인간도 종의 역사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왜 그러냐고 ? 글쎄, 인간이라는 종이 자신들이 만들어낸 문화의 내적 질서를 더이상 견딜 수 없단다. 하지만 이거 웃기지 않은가. 지구의 외적 환경이나 내적 환경도 아니고 인간이 스스로 만든 질서를 견딜 수 없다니.

 

 나는 혜성의 충돌, 기상이변, 한 미치광이에 의해 잘못 눌러진 원자 폭탄의 발사, 공기전염되는 치명적 바이러스의 출현, 인공지능과 기계문명의 가공할 발전 등등의 이유로 인해 인류가 멸망할 수도 있을거라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그러나 인간 자신이 만들어 낸 질서 때문에 스스로 종의 역사에서 물러날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것은 도대체 무얼 뜻하는 것일까? 마치 인류가 이백 년 전에 만들어 낸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이 인간사회의 이곳저곳을 빨아먹고서 이제 인류 스스로도 제어하지 못하는 괴물로 자라 있는 것과 비슷한 것일까 ?

 

 

우리는 불안 때문에 삶을 규칙적으로 만든다. 면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삶을 맞춘다. 우리는 삶을 반복적이고 규칙적으로 움직이게 해서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만든다. 습관과 규칙의 힘으로 살아가는 삶 말이다. 하지만 효율적인 삶이라니 그런 삶이 세상에 있을까. 혹시 효율적이라는 삶이라는 건 늘 똑같이 살고 있기 때문에 죽기 전에 기억할 만한 멋진 날이 몇 개 되지 않는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저는 보험 판매를 하는데 도무지 지하철을 탈 수 없어요. 지하철 속에 들어가면 자신이 도시가 쏟아낸 배설물이 되어버린 느낌이 들어요. 버튼을 내리면 어디론가 정신없이 쓸려내려가는 변기 속의 배설물처럼 말이에요. 퇴근길의 지하철 속에서 사람들은 너무나 지치고 황량한 모습으로 꾸벅꾸벅 졸거나, 무표정하게 광고판을 바라보죠. 하지만 도시에서 상대방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보는 것은 실례잖아요. 그래서 그들의 얼굴과 시선 사이를 피해다니다보면 마치 비좁은 관 속에 들어가 있는 시체가 된 기분이에요. 저는 꼼짝도 할 수 없죠. 저는 그 시간이 두려워요.

 

그래서 마음속으로 항상 주문을 외워요. '걱정 마. 걱정 마. 앞으로 고작 열한 정거장이 남았을 뿐이야. ' 이 기막힌 퇴근이 이루어져서 집에 도착하면 아주 잠시 동안이지만 저는 너무나 평온해져요. 그래서 일단 소파에 빨랫감처럼 허물어져 잠이 들어요.

 

하지만 잠에서 깨면 내일 아침에 또다시 도시의 거대한 배설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고 그러면 공포에 빠져들죠. 요즘엔 지하철만 봐도 구토를 해요. 한번은 지하철에서 구토를 세 번이나 하고 실신한 적도 있어요. 위성도시까지 합친다면 서울은 이천오백만 명이나 살고 있는 공룡 도시예요. 네, 여긴 너무나 큰 도시에요. 여기서 지하철을 탈 수 없다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어요.

 

 

캐비닛  , 김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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