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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그대에게 고함
몇해 전 한 대학에 특강을 나갔다. 친하게 지내는 그 학교 선생님 한 분이 나에게 하소연을 했다. 말인즉 "요즘 학생들이 너무 부지런해서 무섭다"는 것이었다. 부지런한 게 왜 무서워요. 네가 몰라서 그래, 진짜 무서워. 매일 출석하고, 지각도 안하고, 리포트 내는 거 한번도 안 빠지고, 영어 공부도 엄청 열심히 하고, 모든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는데 안 무섭겠냐. 그러고 보니 무섭기도 하겠다. 20년 전에 학교 다닐 때에도 그런 학생들이 있긴 했지만 한두명뿐이었으니 무서울 리 없었다. 모든 학생들이 그렇다면 정말 무섭겠다. 이유는 안다. 학점과 취업과 유학과 기타 여러가지 이유들이 산재해 있으니 공부 안하고는 못 배기겠지. 뒤떨어질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솔직히 이해는 안 간다.
공부 열심히 안했다고 자랑하려는 게 아니다. 학점과 아이큐는 높은 게 좋고, 등수와 방어율은 낮은 게 좋다. 공부 안 한 거 후회할 때도 있다. 영어 공부 열심히 할걸, 특히 영어 회화 열심히 할걸, 후회한다. 책 열심히 더 읽을걸, 반성한다. 새로운 일에 도전해 보지 않은 걸,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보지 않은 걸, 아쉬워한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대학 시절 캠퍼스에서 지나가는 학생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시간, 아무짓도 하지 않던 시간, 정신줄을 놓은 채 목숨 걸고 놀던 시간, 그 완벽한 진공의 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스무살이라는 나이는 너무 싱싱해서 쉽게 상하기 때문에 가끔은 진공 포장하여 외부의 대기로부터 격리시켜야주어야 한다.
20여년이 지났지만 그때 진공 포장해둔 나의 뇌 일부분은 아주 싱싱하다. 학사 경고와 바꾼 싱싱한 뇌다.
김중혁 소설가 <펭귄뉴스> <악기들의 도서관>
- 씨네 21 대학생 특별판 2009.05.24 -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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